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婦人画報(부인화보) 1938년 12월호
관리번호  02265 생산연도  1938년
생산처  일본 킨지가호샤(近事画報社) 유형  종이/책
규격/분량  19cm x 26cm, 190쪽 소장위치  아-1


부인화보 1938년 2월호
婦人画報 1938年12月号

1938년 주식회사 킨지가호샤(近事画報社)에서 발행한 『부인화보(婦人画報)』 12월호이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최승희(崔承喜·1911~1969)의 춤 사진과 12월호 조택원(趙澤元(趙澤元·1907~1976)이 아리랑 환상곡(アリラン幻想曲) 사진이 전면에 흑백으로 실려 있다.

1907년 5월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조택원은 1922년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온 박세면(朴洗冕)을 통해 러시아 민속무용을 배웠다. 1927년 10월 일본 신무용을 대표하는 이시이 바쿠[石井漠]가 두번째로 한성(서울)에서 공연을 본 후 그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27년부터 32년까지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가 일본에 도착했을 때 1년 먼저 최승희가 와 있었다

그는 최승희와 함께 이시이 바쿠의 문하에서 활동했으나 춤 스타일은 서로 달랐다. 최승희가 현대무용의 테크닉에 한국적인 것을 접목한 부채춤이나 초립동이 같은 춤을 그가 지닌 여성미를 한껏 드러내며 응용했다. 이에 반해 조택원은 오락적인 춤보다는 학춤이나 승무, 아리랑 등 민속적인 것을 차용해 새로운 예술 작품으로 '창작'하고 체계화하는 데 몰두했다. 조곡(組曲) '춘향전'은 바로 이러한 민속적인 스토리를 각색해서 창조적으로 만든 작품이다. 그는 무용을 단순한 전승이 아닌 예술이라는 창작의 산물로 발전시켰으며, 무용이 기생·광대의 전유물이 아님을 일반인에 각인시켰다는 점에서 한국무용사에 독보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32년 귀국해 경성보육학교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조택원무용연구소를 설립했다. 1933년 2월 경성공회당에서 「승무의 인상」(「가사호접」), 「우울」, 「땅에 바친다」, 「사랑의 슬픔과 기쁨」 등으로 첫번째 작품발표회를 겸한 신무용 공연을 열어 호평을 받은 이후 한국춤을 현대적 무용예술로 재창조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1937년 프랑스에서 순회공연을 했으며, 이듬해 일본 도쿄 히비야[日比谷] 공회당에서 공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의 무용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창씨개명을 거부해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광복 후에는 1940년 이후 조선총독부 후원으로 제작된 내선일체 주제의 영화 좌담 참석과 국민총력조선연맹 주최 문화선전협의회 참석 및 발표 활동 등이 친일 행적으로 몰려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이승만 정권과의 불편한 관계로 1960년까지 1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해외로 유랑생활을 해야 했다. 그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5·16혁명으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뒤에야 가능했다. 귀국 후 그는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역임했으며, 1976년 69세의 나이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조택원의 주요 작품으로 「만종」, 「승무의 인상」(「가사호접」),「신노심불로(身老心不老)」, 「아리랑환상곡」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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